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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람시간
    하절기(3월~10월) 09:00 ~ 18:00
    동절기(11월~2월) 09:00 ~ 17:00
위대한 불꽃 유관순

3.1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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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유관순열사기념관
3.1운동
민족대표 독립선언(최대섭 作)
민족대표 독립선언(최대섭 作)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 33인이 독립을 선언한다.

학생과 군중은 서울 탑골공원에 모여 있다가 별도의 선언서를 낭독한 후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거리를 행진했다. 기숙사에 있던 이화의 학생들이 만세 행렬에 동참하고자 교문으로 달려갔다. 그러자, 프라이 교장이 학생들을 막아섰다. 유관순과 학생들은 “선생님! 이건 우리의 조국입니다! 우린 우리나라를 위해 나가려는 겁니다. 비켜주십시오.”하고 소리쳤다. 교장은 완강했다. “자, 학생들, 나가려거든 내 시체를 넘어서 교문을 나가시오. 나는 살아서 학생들이 당하는 참변을 볼 수는 없습니다. 자 내 시체를 넘고 나가시오!”. 그러나 독립을 향한 의지를 꺾을 수 없었고, 유관순은 친구들과 담을 넘어 3.1만세시위에 합류한다. 남녀노소, 신분과 계급에 관계없이 “대한독립만세!”를 목놓아 외치며 모두의 마음이 하나가 되는 자유의 기분을 만끽했다.

덕수궁 앞 3.1운동의 행렬 ⓒ서울역사박물관

유관순은 서명학, 국현숙, 김복순, 김희자 5인의 결사대와 함께 3월 5일, 남대문역 학생단 만세시위에도 참여한다. 이 날 유관순은 남산에 있던 경무총감부로 붙잡혀 갔으나, 이화학당 외국인 선교사들의 강력한 요구로 친구들과 함께 풀려난다.

1919년 3월 1일 서울의 만세운동을 시작으로 1,798건의 3.1만세시위가 국내외 각지에서 일어났으며, 참가자는 1,067,886명(국사편찬위원회 기준)에 이른다. 3.1운동은 자유․평화․정의의 사상을 바탕에 두고 민중이 주체가 되어 이뤄낸 우리 겨레 최대의 독립운동이었다. 3.1운동의 열기는 중국, 연해주, 미국 등 전세계로 퍼져갔으며, 4월 1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하는 계기가 되었다.

덕수궁 앞 3.1운동의 행렬

3월 10일, 일제에 의해 휴교령이 내려졌다. 만세운동의 확산을 두려워한 일본의 조치였다. 유관순은 고향으로 가기 위해 3월 13일 유예도(사촌언니), 이정수, 김복희와 충청도로 내려오는 경부선 기차를 탔다. 칙칙폭폭 달리는 기차 안에서 유관순이 물었다. “얘들아, 이 기차 소리가 어떻게 들리니?”하고 물어보자 한 아이가 “동전 한 푼, 동전 두 푼이라고 하는 것 같은데.”라고 대답했다. 유관순은 “내 귀에는 ‘대한독립! 대한독립! 어서오소!’라고 들린다” 말했고, 이 말을 들은 친구들은 손뼉을 치며 대한독립를 외쳐 기차의 차장이 달려와 말렸다. “우리 독립이 된 다음에 다시 만나자”며 다짐했지만, 그 모습은 유관순과 친구들의 마지막 인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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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1-19 16: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