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가기 메뉴
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지명유래

공유열기
  • 페이스북
  • 트위터
  • 프린트
제목 오룡동
팀명 중앙동 등록일 2015-11-30 조회 3810
첨부
 
천안읍성(邑成) 안에 있는 동으로 지금부터 백년전에는 천안의 행정과 문화의
중심지다. 관아와 객사 문루등이 있어서 많은 사람이 오가는 번화가였다.
1920년 지방행정 구역변경으로 읍내리 일부를 갈라서 왜식동명으로 욱정(旭町)이
라고 하였다가 1946년 해방후에 왜식동명을 없애고 오룡쟁주(五龍爭珠)의 지형
설에 따라 오룡동이라고 하였다.

객사(客寺) : 지금은 충청은행이 있는 뒤편이다. 객사는 각고을의 관아에 예속
된 관사를 말한다. 임금님의 전패를 안치하고 초하루와 보름날에
예절을 향하여 절을 하고 사신이나 관리의 숙소로 이용되었다.
한일합방후에 무너졌던 건물을 민가로 사용하다가 시에서 헐어다가
남산공원 위에 정자를 세우고 용주정이라 하였다.

화축관(華祝館) : 지금의 중앙국민학교 정문 앞에 있었다.
임진왜란이 끝난 4년 뒤 천안군수로 있었던 "노대하"가 천안의 정
관으로 세웠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낡고 허물어져 지금은 없어졌
다. 현종 7년(1666)에 군수 조경빈이 개축하였고 현종이 자주 온
양온천에 가면서 행제궁으로 지었다. 화축관을 중수하는데는 충청
감사 민유중(閔維重)과 경상감사 이태연(李泰淵)통제사 이기성(李
祈聲) 충청병사 이원로(李元老) 전라병사 민진익(閔震益)등이다.
영조 26년(1751)에 왕이 온양에 행차할 때 직산의 영소정이 머무르
면서「憶昔感懷」란 현판을 문루인 영남루에 친필로 써서 걸게 하
였다. 또 우암 송시열선생이 지은 기문이 남아있어 그 내력을 자
세히 알 수 있다.

내아터(內衙垈) : 오룡동에서 184번지 지금이 오룡우체국이 세워진 곳이다.
동헌(東軒)의 지형이 오룡쟁주형(五龍爭珠形)이라 이곳에서 아들을
낳으면 귀인이 된다고 전한다.
1989년에 오룡우체국을 다시 지으면서 도헌자리에서 많은 주춧돌과
조선시대의 와당이 나왔다.

선화루터(宣化樓:同樂堂) : 오룡동 184번지 지금의 오룡우체국이 세워진 곳이다.
동헌(東軒)의 지형이 오룡쟁주형(五龍爭珠形)이라 이곳에서 아들을
낳으면 귀인이 된다고 전한다. 1989년에 오룡우체국을 다시 지을
때 동헌자리에서 많은 주춧돌과 조선시대의 와당이 나왔다.

동헌터(東軒) : 오룡동 199번지 지금의 충청은행이 있는 바로 뒤다.
이곳은 오룡쟁주형의 황룡에 해당되는 곳이고 황룡의 눈언저리로
서기를 발하고 통찰하는 관아의 터로는 알맞다고 전한다.
터가 세서 민가로는 알맞은 터가 못되고 관청의 터로 알맞은 곳이
라고 한다. 약 40년전에 천안의 어느 부자가 이 터에다 큰집을 지
었으나 이사하자 곧 죽었다고 한다.

삼문터(三門) : 오룡동 188번지에 있었던 동헌의 정문터. 대개의 동헌 정문은
세 개로 되었고 삼태극을 그려 문을 표시했다. 가운데의 문은 높
고 양쪽에 작은 문을 두 개 내어 일반인이 드나들도록 만들어진 문
이다.

영남루터(永南樓) : 오룡동 118번지에 있었던 문루. 본래 동헌 근처에 있었으나
1919년 이후에 중앙국민학교 운동장 서쪽에 옮겨 세워졌다가 1953
년 삼거리공원의 연못가에 세웠다.

동리(東里) : 지금의 오룡동지방을 일컫는 말. 천안을 동리 중리 서리로 나누어
부를 때 천안의 동쪽지방이라고 동리라고 하였다.
13. 백석동(白石洞) 北쪽으로는 차암동, 東으로는 성정동, 봉명
동,
南으로는 불당동, 西쪽으로는 아산군과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천안
농공단지가 들어서면서 최근에 크게 발전되었고 아산만으로 이어지
는 도로가 마을을 관통하고 있어 전망이 밝다.
마을 이름이 白石으로 불리우는 까닭은 지금의 마을 앞에9저수지
제방이 있는 곳) 흰색의 바위가 많이 있어서 白石으로 되었다.
백석동의 속명은 「한들」이라고 부르며 한들은 일반적으로「큰
들」에서 연유되었다고 전하나 실은 「흰돌」에서 온 것이다.
「흰돌」이 변해서 「한들」이 된것이다. 언뜻 생각하기에 백석동
에서 불당동으로 이어지는 넓은 들 때문에 생긴 이름같으나 본래의
마을 이름은 「흰돌말」이다. 1914년 행정구역 변경으로 송골 산
직골 승적골을 합쳐서 白石里라 하여 영성면에 편입되었고 1931년
天安市에 편입되어 白石洞이 되었다.

호미걸이고개 : 성정동 봉명동에서 백석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다.
백석동 동리에서 바라보아 꼬부라진 고갯길이 호미를 걸어 놓은
것 같은 형상이라 호미걸이 고개다.
고개위에 올라서 바라보면 천안의 시가지가 한눈에 보이고 고개 마
루턱에 용화사가 있고 왼쪽으로는 보림사가 있다.
(고개가 S자 모양으로 되었다.)

송골(松谷) : 호미걸이 고개를 넘어 첫마을이다. 옛날에는 고개 양쪽에 솔밭이
우거지고 老松이 많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아산군 음봉면에 통하
는 길가 마을로 몇 개의 주막이 있었고 점토로 옹기그릇을 구었던
곳이나 지금은 모두 없어지고 몇채의 집이 있을 뿐이다.

서밭댕이(薯밭) : 백석동리의 앞들을 말한다. 옛날에는 가뭄에 물대기가 어려워
감자를 많이 심었다고 하여 서밭이 되었다. 또는 조나 수수를 심
었다고 수수밭이라고 하여 서밭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옛날 이곳에는 당집 : 神堂이 있었다.)

건는들(乾野) : 백석동 앞들이다. 물이 귀한 건답들이라 건들이다.
환서초등학교가 있는 교문앞에 작은 저수지(한들방죽)가 만들어지
기 이전에는 매우 메말라서 모심기가 어려워 건들에서 온 말이다.

산적말(山寂洞) : 호미걸이고개의 서남쪽에 있는 마을.
도로에서 마을이 보이지 않고 한적하여 산적마을이다.
또 마을에 내려오는 전설에 의하면 옛날에 내륙지방 사람들이 소금
을 구하기 위하여 아산만 쪽으로 가는 큰길가였기 때문에 산도적이
살던 산채가 있었다하여 山賊마을이라고도 전한다.

승적골(勝賊谷) : 개목뒷산(鳳樓山) 넘어 서쪽의 골짜기를 말한다.
길손을 괴롭히는 山賊을 무찔렀다고 勝賊골이라고 하였다.
마을에 내려오는 전설에 의하면 임진왜란때 왜병들을 대파한 곳이
라 勝賊골이라고도 전한다.

서낭댕이(城隍堂) : 백석동에서 성성동으로 넘어가는 낮은 고개에 있다.
고개를 넘나들던 길손들이 고목나무 밑에 돌을 던져 돌묻이를 만들
고 서낭신으로부터 보호를 빌었던 곳이다. 지금은 아무 흔적도 없
고 고목만이 우뚝 섰다.
일제때는 金을 캐기 위하여 서낭당 고개 밑에까지 광구가 설치되어
있었다.

도둑골(盜賊谷) : 호미걸이 고개에서 북쪽으로 군부대가 있는 골짜기.
도둑들이 모여 살았다고 도둑골이다. 또 이곳에는 도깨비집이 있
었다. 도깨비를 위하여 마을 사람들이 거적으로 움막을 지어주고
도깨비를 살게 하였으며 초하루 보름으로 떡을 움막집에 해놓고 빌
기도 하였다.

※ 백석동은 아산만에서 생산되는 소금과 내륙지방에서 생산된 곡식이 교환되는
지점으로 예부터 길손이 많았고 이에 따라서 행인을 노리던 路賊이나 山賊도 많
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여루물(狐井) : 농공단지와 백석동마을 사이에서 성정동 쪽으로 넘어가는 골짜기
「여우우물」이 변하여 여루물이 되었다. 여루물 북쪽에 작은 우물
이 있는데 가뭄에도 물이 끊이지 않고 넘쳐 흘러 여우들이 먹고 갔
다고 전한다.

서목골(서목골:西淵谷) : 마을 뒤편의 현재의 농공단지에 있는 골짜기.
서목골이라고 전하나 목골이 아니고 못골이다.
본래 이곳에는 작은 연못이 있어 서쪽에 있는 연못이라 서못골이
서모골로 변음되었다.(지금도 작은 저수지가 있다) 최근에 설치된
농공단지 때문에 점차 자취가 없어져 가고 있다.

큰골(大谷) : 현재의 농공단지가 들어선 자리다. 골짜기가 커서 대곡으로 불렸
고 글자 그대로 큰골이라 큰 건물이 세워졌다.

작은 노태산(작은 魯泰山) : 백석동과 두정동 사이에 정 3각형 모양으로 된 산.
두정동에 큰 노태산이 있고 백석동에 작은 노태산이 있다.
中國의 山東지방에 있는 魯나라의 泰山이름을 따서 魯泰山이라 하
였다. 山위에 작은 山神閣이 있었으나 지금은 없어졌고 군부대에
서 세운 GP만이 있다.

목록 링크복사

만족도조사
만족도 조사

현재 페이지의 내용과 사용편의성에 만족하십니까? 만족도 조사결과는 서비스 개선을 위한 자료로 활용됩니다.

담당부서 :  
총무팀
연락처 :  
041-521-4824
최종수정일 :
2024-02-20 16: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