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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은지리
팀명 북면 등록일 2015-11-30 조회 2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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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천군 북면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동지동, 채동, 은석리가 통
합하여 은석리의 은자와 동지동의 동자를 따서 은지리라 하고 북면에 편입되었
다.

박문수묘(朴文秀) : 영성군묘. 은석사 뒤에 있는 영조때의 어사로 유명한 박문수
묘.

전설 : 묘가 은석산 거의 상봉에 있는데 현재 위치에서 병천장이 내려다 보이며
박문수의 유언에 병천장의 소장이 세 번 옮기면 나의 묘를 파서 아래로
옮겨 달라고 했는데 현재 병천소장이 두 번 옮겼다고 전한다.

은석골 : 은석리라고도 하며 은석사 밑에 있는 마을.
고종때 참판 박봉빈(朴鳳彬)이 살았다.

채동 : 은석굴 서북쪽에 있는 마을로 고려때 이곳에 채정승이 살았다고 하며 채
상유지가 채동 뒤 날근 터에 있다.

은석사 : 은석산에 있는 절. 신라 제 30대 문무왕대 원효대사가 창건했다 하며
인조때 문장 백곡 김득신, 월봉 이극태, 학촌 권현, 사정 류지림, 도원
김만중, 송정 김대년, 백은 김면, 전은 한빈, 만호 황곡림이 이곳에 와
서 은산 시사를 두고 때로 문장을 강론했으며 영조대 국봉 남취흥, 만화
류진한, 무경 김중산, 류도천, 어은 류철한, 황성 유도행, 김양행, 김종
후 등이 또한 계속하여 시와 문학을 연마 하였으므로 더욱 유명하였다.

택사샘 : 웅덩이 통미 동쪽에 있는 웅덩이. 부근에 택사가 잘되어 택사를 심었
었는데 현재는 농지정리로 없어졌다.

강당골 : 은서과 채동 중간에 있는 골인데 강당이 있다.

동지갱이 : 통미 뒤에 있는 들. 옛 집터가 있었는데 구리와 주석의 광(창고)이
있었다.

통미 : 은지리와 비룡사의 들에 있는 외딴 산.

전설 : 비룡앞 내(川)건너 은지리 지역에 통미라기도 하고 개금산이라고도 부르
는데 이 산이 옛날 큰 홍수때 안성 땅에서 떠내려 오다가 이곳에 걸치어
있는 것이라 한다. 그래서 안성원이 자기네 땅이라고 매년 개금 두말을
도지로 달라하여 목천원은 개금 두 말씩 매년 바쳤는데 이 산에서 나오는
개금이 도무지 줄 것도 안나오고 그렇다고 보태줄 수도 없고 매년 도지
주기도 번거로우므로 안성원님에게 도지를 못 바치겠으니 산을 도로 가
져 가든지 아니면 도지를 면제해 달라고 통보하니 안성쪽에서 답변이 오
기를 그럴수는 없다고 하면서 못 받치겠으면 재(타고 남은 부산물)로 새
끼를 꼬아 이 산을 붙들어 매놓으면 가져 가겠노라고 하였다. 목천원은
바치지 않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재로는 도저히 새끼를 꼬아 묶어 놓을
수도 없는지라 고심을 하고 누워 있는데 목천원의 다섯 살 된 아들이 아
버지가 고심하는 것을 보고, 아버지 무엇 때문에 그렇게 고심하고 누워
있느냐고 여쭈어 보았다.
아버지 대답이 아이들은 알것이 못된다고 하니까 아들의 말이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고 하는데 소자가 알아서는 안됩니까 하였다. 이 말을 들은
아버지인 원은 자초지종 내용의 이야기를 아들에게 말을 하였다. 아들은
걱정할 것 없습니다. 제가 좋은 방도가 있으니 저에게 맡겨 달라고 청하
였다.
원은 어린 것이 무슨 통쾌할 방도가 있을까 하고 그냥 승낙하였다. 아들
은 나가더니 동네사람을 전부 모아 놓고 집에 가서 볏짚 한짐씩 지고오라
하였다. 볏짚을 한짐씩 지고 동 네 사람이 모이니 그 볏짚으로 동아줄
을 틀라고 시켰다. 다 틀은 동아줄을 산을 몇바퀴 돌려 묶어놓고 아버
지에게 와서 이제 다 되었으니 안성원에게 산을 재로 묶어 놓았다고
가지고 가라는 통보를 하라고 하였다. 아버지가 나와 보니 재로 묶어 놓
은게 아니라 동아줄로 묶어 놓았으니 되겠느냐고 하였다. 아들의 말이 안
성원이 오기 전에 재로 바꾸어 놓을 수가 있습니다 하였다. 원은 사람을
시켜 안성원에게 산을 묶어 놓았으니 가져가라고 통보하였다. 안성원은
재로는 도저히 새끼를 꼴 수가 없는게 분명한데 꼬아 묶었다는 것이 믿어
지지 않다가 통보인의 말에 묶었다고 하므로 가서 보기로 하고 목천을
향하여 오는데 안성원이 온다는 기별을 받은 옥천원의 아들은 안성원이
당도할 무렵 동아줄에 불을 당겼다. 동아줄은 타서 재가 되고 그대로 있
으므로 재로 새끼를 꼰 것 같이 되었다. 미리 불을 놓으면 재가 날라가
기 때문에 늦게 불을 놓은 것이라 한다. 안성원이 당도하여 현장을 보니
정말로 새끼를 재로 잘 꼬아 묶어 놓았으므로 재주를 탄복하고 이 통미산
을 목천에 주고 갔다한다.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목천주민들은 매년 짚
을 모아 동아줄을 틀어서 북면에서 내려오는 병천천을 기준으로 하여 동
서기 나누어 줄다리기를 했는데 차차 규모가 줄어서 나중에는 목천과 북
면 으로 나누기도 했다가 광복될 무렵까지 이어져 왔다고 한다.
신촌말 채동 서쪽에 새로된 작은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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